본지오름(2104-1번지 일대)
길 잃은 듯 천천히 걷는 오름, 한적한 정취가 머무는 곳
해발고도: 약 230m
소요시간: 왕복 약 1시간 10분
길 상태: 흙길, 억새길, 좁은 나무계단
난이도: 쉬움~보통 (경사 구간 약간 있음)
주변 환경: 폐감귤 창고, 돌담길, 억새밭, 조용한 밭마을
계절 추천: 가을 (억새 절정), 봄 (햇살 고운 들판)
분위기: 사람 적고 조용한 오름, 묵묵한 사색이 흐르는 곳
문화/설화: 마을 이름 본지(本地)에서 유래, 지역 중심이란 뜻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2104-1번지 일대
본지오름은 제주 중산간 밭마을 사이, 조용히 묻혀 있는 오름이다. 이름만 보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막상 걸어보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낯설지 않다. '본지'는 '본디 이곳'이란 뜻으로, 예전 마을 중심지를 뜻하는 말이었다 한다. 그 이름처럼 이 오름은 화려하지 않아도 중심이 되어주는, 그런 자리에 있다.
초입은 폐감귤 창고를 지나 좁은 흙길로 이어진다. 길 옆엔 키 큰 억새가 나란히 자라고 있고, 돌담 사이로는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간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 사람 하나쯤 지나갈 법도 한데… 아무도 없다. 그게 더 편하다. 바람과 흙, 풀냄새만 있는 그 순간이 좋다.
한참을 걷다 보면 살짝 가팔라지는 구간이 나온다. 나무로 만든 계단이 놓여 있지만, 낡고 좁다. 조심히 밟고 올라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 오름 아래 마을이 푸근하게 펼쳐진다. 햇빛이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 그 풍경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그냥 한참을 바라보게 만든다.
정상에 도착해도 누군가 먼저 와 있을 가능성은 낮다. 그만큼 조용한 곳이다. 벤치 하나 없이 그저 너른 억새밭과 바람뿐. 가만히 앉아 귤 하나 까먹다 보면, 흙먼지에 덮였던 마음도 조금씩 걷힌다. “이 오름은 말이 없수다.” 혼잣말처럼 내뱉었는데, 진짜로 아무 대답도 없다. 그 정적이 좋다.
하산길은 반대편 숲길로 이어진다. 길은 좁지만 그늘이 좋아서 한결 편하다. 산책하듯 걷다 보면 새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땅을 쪼는 까치 소리에 고개를 들게 된다. 어딘가 옛 정자가 있던 터를 지나면서, 문득 “여기서도 누군가는 날을 보내고 갔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름 아래 마을로 내려오면 조그만 슈퍼가 하나 있다. 간판은 빛이 바랬고, 음료수 냉장고도 오래돼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신 미지근한 사이다 한 병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수고했수다, 이제 돌아가라우게.” 주인 할머니 말에,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본지오름은 강렬한 감동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남긴다. 묵묵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바람과 흙과 햇살 사이에 나를 잠시 내려두는 곳. 조용히, 천천히 오를 사람에게 가장 좋은 오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