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은이오름과 물찻오름 사이, 붉은오름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선 누구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그마한 언덕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지도에도, 표지판에도 이름 없이 놓인 이 오름은 제주 사람들조차 “마은이 옆에 있는 거기 그 조그만 오름” 정도로만 부르지요. 하지만 그 무명 오름을 실제로 올라본 사람들은 압니다. 이름 없어도 기억에 오래 남는 공간이라는 걸.
위치는 분명하되, 존재감은 조용한 이 오름은 마은이 능선에서 바라보면 가장 잘 드러납니다. 붉은오름방면 숲길을 따라 걷다가 살짝 비켜난 방향으로 가보면, 완만하게 둥글게 솟아 있는 능선이 억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주변의 큰 오름들에 가려 늘 그림자 속에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제주 동부 오름 지대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배경 같은 오름이기도 하지요.
입구는 숲길처럼 뚜렷하진 않지만, 억새 사이로 난 가느다란 발자국 흔적이 방문자를 이끕니다. 탐방로라기보다, 걸을 줄 아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길이라고 해야 어울리겠지요. 길을 따라 몇 분 걷다 보면 낮은 능선이 하나 펼쳐지고, 그 끝에서 고개를 들면 물찻오름의 곡선과 붉은오름의 기운이 포개지듯 바라보입니다.
정상은 특별한 표식도, 쉼터도 없습니다. 다만 나지막한 억새들과 바람 소리, 그리고 사람이 거의 지나지 않은 듯한 조용함이 이 오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고요한 제주의 심장부 한가운데, 마치 일부러 비워둔 공간 같달까요. 주변 대형 오름들보다 먼저 오르지 않아도,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화구는 없지만 언덕의 곡선은 부드럽고 단정하며, 억새와 들풀이 사계절 다른 얼굴로 바뀌어 오름에 계절의 옷을 입혀줍니다. 봄이면 이름 모를 들꽃이 낮은 풀숲을 밝히고, 가을이면 억새가 이 오름을 잊지 말라며 일렁이지요.
하산길은 짧습니다. 단 몇 분이면 다시 붉은오름 가는 삼거리로 이어지고, 이내 붉은오름의 넓은 분화구 초입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작은 오름은 그렇게 붉은오름과 물찻오름, 마은이오름을 잇는 연결점이 되면서도, 조용히 자신의 이름 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는 셈이지요.
이름이 없다는 건 어떤 면에선 가장 제주다운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 묵묵히 있는 것. 때론 그게 진짜 자연이 말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곳, 바로 그게 이 무명의 오름이우다.